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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편린

리진, 신경숙

편-린 2018.06.21 21:56

|리진, 신경숙




리진은 1권과 2권 총 두 권의 책이다.


처음 책장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이 사랑은 두 사람을 긴 여행길에 오르게 했다.' 라는 문장을 보고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구나..싶었고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너무 울었기에 이 책은 부디 조금만 울었으면 바램이 있었다.


그러데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런 기대감들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고

이 책의 이야기 그 자체에 매료되어 나는 한국의 근대와 전근대가 만나는 지점, 그 시대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조선과 파리를 넘나들면서 내가 가보았던 파리가 아닌 100년전의 파리를 상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 아닌 역사소설이다.

A4용지 한장 반 정도 되는 분량의 실제 프랑스에서 출간된 조선에 관한 책을 읽은 작가가

실존 인물인 리진의 흔적을 찾기 위해 파리로 찾아가기도 했다는 사실은 나를 더 놀랍게 했다.

그녀의 자취를 수소문 했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고 작가는 전기가 아닌 소설을 쓰기 위해 상상력을 높였다.


'자, 이제 백 년 전의 한 여인을 백 년 후의 이 세상으로 내보낸다.

리진 당신이 사람들 속에 사랑스럽게 섞여 다시 잊혀지는 일 없이 현재형으로 존재하게 되기를 바란다.'

라는 작가의 말은 이 소설을 모두 읽은 나에게 한없이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인줄로만 알았던 이 소설은 중간 중간 툭툭 내밷는 듯한 문장들로 하여금 나를 고독하게 했고 1권과 2권의 내용은 확연히 달랐다.

1권은 돌로미테 여행을 하며 모두 읽었고, 2권은 포르투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모두 읽었는데 역시나 비행기에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냥 슬퍼서 눈물이 쏟아졌다기보다는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한탄하듯이 눈물이 나오고야 말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어 빠져나오지 못하더니, 마음이 찢어질듯한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버리고 만 것이다.





신경숙 작가님의 책은 '모순'을 시작으로 '엄마를 부탁해' 다음으로 '리진'을 읽었는데,

이 세개의 책 모두 다 느낌이 너무나도 다르다. 그 와중에 신경숙 작가님의 느낌은 살아있으면서도.


늘, 여행이나 등산 관련 된 에세이 책만 읽다가 언젠가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 관심이 없었는데 '책의 시간'에 참여한 이후로 나의 생각은 달라졌고,

소설이 이렇게나 재미있고 흥미롭다는 것을 알게 되어 너무 기쁘기도 하다.


앞으로는 좀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보려 한다.

그리고 리진을 통해 - 역사소설이 아닌 역사소설을 통해 - 평소 얕기만 했던 역사에 대한 관심도 부풀어 올랐다.



아직도 나는 책에 대한 나의 마음이 한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노력해서 이 마음을 넓혀가고 싶다.

늘 생각하던 것. 생각하고, 읽고, 쓰는 것.











리진 1



이 사랑은 두 사람을 긴 여행길에 오르게 했다.


/


오래 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일수록 그를 변화시키려 해선 안 된다.


/


다만 진이는 봄이 되면 눈부시게 흰 꽃이 피어나던 배나무를 기억했다.

배를 처음 먹었던 때를 선명하게 기억하듯이.


/


때로 죽음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무기가 된다.


/


입안은 단물이 고이고 눈으로는 물방울이 맺혔다. 천지에 배꽃이 바람에 가벼이 흩날렸던 곳으로,

어머니와 함께 있던 그 시간 속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어린 진이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


외로운 이에게 어린애의 체취는 따듯한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같다.


/


씻어서 깨끗해지는 건 더러운 게 아니다. 그냥 뭐가 묻은 것이야. 누더기를 입은 사람을 더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러운 게 아니라 가난한 것이지. 가난한 것은 그 사람 허물이 아니다. 하지만 마음이 더러워지면 씻을 수가 없는법이다. 그것은 죄가 되지.


/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살아가는 일이 덜 힘든 법이다. 좋아하는 일로 힘이 들게 된다 해도 그 힘듦이 살아가는 의미가 되는 게야.

너는 부자다. 마음 속에 선교사님이 있지 않니.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진짜 가난한 사람이거든.


/


음악을 느끼는 사람은 여럿이 한자리에 있으면서도 혼자 있는듯한 얼굴이 된다.

육체의 것이 아니라 영혼의 것이기 때문이다.


/


장난기 없이, 놀라움 없이, 구경하는 마음 없이.


/


어젯밤은 비가 내리더니 오늘 밤은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벽오동 나뭇잎이 살랑이고 어디선가 밤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로 개는 집을 지키는 게 아니라 인간의 고독을 지킨다.


/


그러나 두 사람이면 마음도 두 갈래인 모양이었다. 웅덩이 앞에서는 냇물을, 냇물 앞에서는 강물을, 강물 앞에서는 바다를 찾는 게 인간의 생리이기도 하다.

바다 앞에서도 물이 모자라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인간뿐인 것이다.


/


말이란 길게 할 수록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말해야 될 때가 아닌데 말을 하고 있을 때라면 더욱 그렇다.


/


아름다운 것은 짧은 침묵의 순간을 가져온다.


/


바람에 흔드리는 나뭇가지가 저럴까.

금빛 모래의 흩어짐이 저럴까.


/


샴페인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가 식탁 주변을 맴돌았다. 세 사람이 샴페인잔을 들고 리진을 보았다.

꽃 사이에 앉아 혼자 마시자니 달이 찾아와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다, 고 했던 이는 이백이었지.


/


한순간에 발생한 예기치 않은 일이 인생을 이끌어가기도 한다.


/


큰 발을 가진 사람에게 작은 발자국을 남기라는 모순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


밤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낮의 고통조차 담담히.


/


산마루를 넘으면 또 산이어도 길이 있겠지, 여겨야 살아갈 수 있다.




*



리진 2



홀로 깨어 있고 싶은 밤이 있다.


/


나는 누구일까? 조선에서는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다. 나를 이 세상에 오게 한 부모는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허방을 짚는 듯 리진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멀어져가는 새장수를 바라보는 리진의 검은 눈동자에 우수가 실렸다.


/


이른 봄 햇살이 그녀의 목덜미 위로 쏟아져내리고 두 손에서 풀려나온 종잇조각들이 봄 바람에 밀려 주위에 이리저리 떠다녔다.

그것은 흡사 봄을 맞이해 나래를 편 금빛 나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


멸시의 가장 완곡한 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는 장소에 홀로 버려진 듯한 고독이 리진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두 언덕을 내려오고 있는데 홀로 오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


강연이 반촌의 벽장에 쌓아놓았던 마지막 서찰엔,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디에다 견주려 하나 그래볼수록 이 세상이 좁아 마땅히 견줄 수 있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씌어 있었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디에다 견주려 하나

그래볼수록 이 세상이 좁아 마땅히 견줄 수 있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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